오늘날의 키보드 배열은 옛날 타자기 배열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결국 현재 한글 키보드의 배열을 알려면 예전 한글 타자기 시절로 거슬러올라가야 하는데..
타자기라는 것이 아무래도 로마자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 나온 것이다보니, 동아시아권에서는 고유의 문자를 타자기로 치기 힘들었습니다. 한자는 아시다시피 너무 글자수가 많고, 한글은 라틴 알파벳과 비슷한 자모 글자수를 가진 음소 문자이지만 모아쓰기 체제 때문에 구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자 타자기도 있었긴 했는데.. 아무래도 로마자 타자기의 편의성에는 비할 수 없죠.
일본도 한자를 쓰긴 매한가지이고, 그래서 동아시아에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가 빠르게 도입된 데에는 타자기의 입력의 불편함이 한몫 했습니다.
한국어는 일본어와 달리 발음하는 음절의 가짓수가 많아 동음이의어가 적어서 한글로만 입력해도 (띄어쓰기를 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한자를 병행하지 않아도 의미의 전달이 충실히 잘 될 수 있기 때문에, 한자 입력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고 한글만 타자기로 입력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글은 음소 문자이지만 라틴 알파벳처럼 그냥 옆으로 하염없이 풀어쓰기만 하면 되는 쓰기 체제가 아니고, 초성 중성 종성을 한 음절 단위로 모아서 모아쓰기를 해야 하는 체계였기 때문에, 언제 이 음절을 끝내고 다음 음절로 넘어가야 하는지 인식할 수 있어야 했고 또한 그 음절에 조합되는 모양에 따라 같은 음소라도 모양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예시: 끝이 꼬부라진 기역) 지금이야 컴퓨터의 언어 입력기가 그런 판단을 소프트웨어적으로 자동으로 내려주지만 그 당시에는 그걸 수동으로 기계적으로 구현해야 했다는 게 문제였죠.(*이 영상에는 언급되지 않는 이슈지만 컴퓨터로 와서도 모아쓰기 음절의 다양함으로 인한 압도적인 유니코드 수 때문에 한글 완성형 vs 조합형 논쟁이 있을만큼 모아쓰기는 한글을 전산화하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 한글학자들이 한글 풀어쓰기 안을 내놓았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의 음소를 아예 로마자처럼 옆으로 계속 쓸 수 있게 풀어쓰기 논쟁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풀어쓰기에 익숙하지 못했고 기본 자형을 풀어쓰기에 맞게 바꿔야 하는 등 여러 문제점이 있었죠. 풀어쓰기 논쟁은 다분히 한글 전산화를 의식한 것인데, 공병우 박사의 세벌식 타자기가 등장하자 곧 그 논의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모아쓰기 문제를 해결한 타자기의 등장이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풀어쓰기를 하자는 의견이 더 득세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이 한글 모아쓰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한글 타자기 배열들이 난립하는 춘추전국시대가 되었습니다.
공병우 박사의 세벌식 : 초성, 중성, 종성의 자리를 각각 구분하여 타자를 치도록 하였기 때문에 SHIFT를 입력하는 등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도 즉시 초성, 중성, 종성을 타자기가 구분하여 타건할 수 있었으므로, 가장 압도적인 속도와 효율성을 자랑하였습니다. 하지만 글씨를 빨랫줄 글꼴로 출력할 수밖에 없어 당시에 (전통적인 네모꼴 글꼴에서 벗어난 탈네모꼴인 글꼴이라) 이 빨랫줄 글꼴을 심미적으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아름다운 자형"을 구현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공식적인 문서에 탈네모꼴 글꼴을 구현하기는 좀 글꼴이 탐탁찮다고 생각한듯)
김동훈 다섯벌식 타자기 : 옆자음, 윗자음, 긴 모음, 짧은 모음, 받침용 자음 등 다섯 세트의 글쇠로 나누어 한글의 전통적인 "깔끔하고 예쁜" 네모꼴 자형을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벌이나 되는 자형을 QWERTY 자판에 우겨넣으려다 보니 SHIFT를 많이 사용하게 되고 타자속도가 비교적 느린 단점이 있었습니다.
정부 표준 네벌식 타자기 : 여러 타자기 배열들이 난립하여서 혼란스러운 와중에(*심지어 그 배열 자체로도 계속 개선한다고 배열 업데이트를 수시로 하면서 혼란이 더 가중됨), 당시 정부 주도로 네벌식 타자기가 표준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글꼴은 다섯벌식 타자기보다 예쁘지 않고 글쓰기 속도는 세벌식 타자기보다 느린, 세벌식과 다섯벌식 사이의 어정쩡한 배열이었습니다. 정부 표준이라는 것 때문에 물량 공세에 힘입어 세벌식, 다섯벌식보다 점유율이 크게 앞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의 시대가 오고, 표준 두벌식의 시대가 오게 됩니다. 컴퓨터의 내장 프로그램을 통해 같은 자음을 쳐도 그것이 초성인지 종성인지 알아서 판별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음과 모음 두 벌로 압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배열은 1950년대에 만들어진 전신타자기용 자판을 계승한 겁니다. 모스 부호를 보낼 때에는 어차피 풀어쓰기 식으로밖에 못 쓰기 때문에 자음과 모음 두 벌로만 구성했던 것이죠. 결국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두벌식 자판은 풀어쓰기의 전통을 계승하는 타건 방법의 후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컴퓨터와 타자기가 함께 쓰이던 과도기에는, 컴퓨터 워드프로세서에나 적합한 두벌식을 타자기에도 그대로 정부 표준으로 적용하여서 타자기에도 두벌식을 쓰게 했는데, 컴퓨터와 달리 종성(받침)이 있는 음절인지 여부를 자동 인식하지 못해서 종성이 있는 글자를 치려면 그 중성(모음)과 종성(받침)을 모두 SHIFT를 누른 후 타건해야 하는, 타자기로서는 좋지 않은 배열이 되었습니다. SHIFT를 많이 누르면 힘이 약하고 피로해지기 쉬운 손가락인 소지(새끼손가락)가 매우 쉽게 피로해지고 아파옵니다. 특히 타자기의 타건은 키가 억세서 컴퓨터 키보드의 타건보다 타건시 더 많은 힘이 들어가므로, 똑같이 SHIFT를 눌러도 타건시 키보드 타건에서보다 더 손이 심하게 아픕니다.
현행 표준 두벌식 자판은, 자음을 담당하는 왼손의 노동량이 훨씬 높고, 자음의 배치도 인체공학적으로 불합리해서 특정 손가락이 너무 많은 과부하가 걸리는 것이 고질적인 문제로 꼽힙니다. 두벌식으로 가능한 여러 두벌식 배열안들 중에서도 표준 두벌식 자판은 인체공학적인 지표가 썩 좋지 않게 설계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정부 표준으로 밀고 나간 자판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졌고 경로의존성 때문에 이 한글 배열이 최종 승리자가 되었습니다.(*마치 인체공학적으로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는 QWERTY가 경로의존성 때문에 최종 승자가 되었듯이.)
공병우 박사는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의 시대가 온 뒤에도, 한글문화원을 설립하고 컴퓨터 환경에 맞게 개발한 새 세벌식 자판을 연구 배포하는 등 죽는 날까지 한글 입력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현재에도 윈도우 컴퓨터에서 표준 두벌식 외에도 세벌식 390, 세벌식 391(최종) 배열을 기본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소수의 사용자들만이 세벌식 390, 391를 쓰고, 극소수의 한글 자판 매니아들이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세벌식 자판을 개발하여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파생 세벌식 자판 이야기를 하자면 글을 하나 더 써야 할 정도로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표준 두벌식 배열. 거의 모든 한글 사용자들이 pc에서 이 배열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벌식 390 배열.
세벌식 391(최종) 배열. 세벌식 390보다 한글 타건시에 더 유리한 점이 있지만 대신 몇몇 특수기호를 칠 수 없기 때문에 영문 QWERTY로 전환해서 그 특수기호를 누르고 다시 한글 자판으로 전환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쓴 글쓴이는 본인이 자체적으로 인체공학적인 지표가 개선된 또다른 네벌식 자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스플릿 키보드 하드웨어에 한글 세벌식 배열이 맞지 않아 수정하는 김에 여러 영문 대안 레이아웃들의 인체공학적 특징들을 참고하여 스스로 만들었는데.. 인체공학적으로는 이 배열이 최강이라고 자부하긴 합니다만 대중적으로 쓰이기에는 초반 진입장벽이 낮지는 않은 단점이 있습니다. 충분한 테스트 이후에 공개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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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엔 가독성 문제를 논하기에는 한번도 대중 전반이 풀어쓰기식 한글에 익숙해진 적 자체가 없기 때문에.. 충분한 테스트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각에 대한 반각처럼 음소를 풀어쓰는 대신에 각 음소의 가로폭을 절반으로 줄여쓴다면 옆으로 너무 길지는 않을 수 있을 거 같긴 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