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초 국제그룹은 21개에 달하는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서열 7위에 올라 있었다. 1947년 양정모 회장이 부산에서 시작한 '왕자표 고무신' 사업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 '프로스펙스'를 탄생시킨 국민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85년 2월 21일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은 국제그룹 전체를 해체한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내놓았다. 훗날 양정모 회장은 "자고 일어나니 기업이 해체되어 있었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명목은 부실기업 해체였지만 의아한 점들이 있었다. 국제그룹의 부채비율이 900% 비율로 높다지만 예금 금리만 10%인 초고호황 시절에, 다른 기업들도 500~600%는 된다는 점. 집권 여당의 부산 지역 총선 패배 이후 제2금융권 등이 일제히 국제그룹의 돈줄을 묶었다는 점. 해체를 선언한 제일은행조차 전날 그 결정을 받았다는 점 등이었다. 해당 시기 전후로는 정권의 미움을 받았음을 꼽는다. 양정모 회장은 청와대가 주도한 일해재단 성금으로 다른 재벌보다 적은 5억 원을 어음으로 내려다 재단 이사장에게 "야박하다"는 면박을 당했다. 국제그룹은 이미 영부인과 대통령 동생이 운영하던 재단에 성금 3억 원만 기부하여 전두환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전두환이은부산에서 선거 협조를 부탁했으나, 양정모 회장이 다음 날 아들의 49재를 챙기기 위해 부산을 떠나자 전두환은 이에 크게 분노했다는 일화가 가장 유명하다.
민주화 이후 양정모 회장은 그룹을 되찾기 위한 긴 법적 투쟁에 나섰다. 일전일퇴 끝에 1993년 7월 헌법재판소는 국제그룹 해체 조치가 사유재산권을 침해한 명백한 위헌 행위라고 판결했다. 이 결정은 대통령의 통치행위 역시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천명한 판결로 회자된다. 하지만 이 결과가 실질적인 구제로 이어지지 못했다. 대법원은 정부의 강압 행위가 위헌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로 체결된 인수 기업과의 사적인 계약까지 무효로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1996년 양 회장 측에 최종 패소 판결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권력 핵심이 재단과 단체를 세우면서 기업 돈을 뜯는다는 말 부터가 기이하다. 결국 독재는 시장경제와 거리가 멀다. 독재가 불러오는 수많은 권력 횡포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런 정리를 굳이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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