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2/03/19 03:34:41
Name 식용오이
Subject 어느 최강 저그 유저를 위한 변명.
- 이메일클럽의 기사를 읽고... 하나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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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넘 학습지값 벌이에 바빠서 -_-  "최인규 Gogo~~! 기욤 퐈이튕~"
머 이런 허접잖은 리플이나 달고, 남는 시간에 좋은 글들 읽고 사라지는
PGR21의 ROM족(Read Only Member), 식용오이랍니다.
이 곳에 드나든 지도 벌써 반 년 쯤 된 거 같은데...
고생하시는 운영자님들께 제대로 인사도 못드린 것 같아서 항상 뒤가 간지러웠죠.
이참에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PGR21도 퐈이륑~~!!"

...며칠 전 조선일보 이메일 클럽을 통해 저한테 온 한 기자의 편지를 보고,
'여러 게시판 날(=Day) 잡겠구먼'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죠.
(물론 PGR21은 다를 거라고 믿었어요)
집사람 병간호하느라 간만에 이틀을 쉬고 여기저기 다녀 보니
아니나다를까, 예상이 꼭 맞더군요. -_-;;;

식용오이, 지금은 조그만 인터넷 회사에서 머리쥐어뜯으며 일하고,
밤이면 내키지 않는 비싼 술 '영업'이라는 명목으로 접대하고 삽니다만...
한때는 여기저기 밥 잘 얻어-_-먹고 다니던 민완기자 출신이랍니다.

이 밤, 잠도 안오고... 그 글에 대한 얘기를 꼭 한번 하고 싶네요.
기자에 대한 얘기일 수도, 게임에 대한 얘기일 수도 있는, 그런 얘기를...


여기서도 가끔 보이는 임기자는 '게임'이라는 것에 다른 기자들 보다
훨씬 정확하게 접근하시던 분이었죠.
(기자'님'이라는 표현을 안쓴다고 평칭 내지 비칭이라고 하진 마시길.
기자는, 비록 '놈 자'짜를 쓴다고 하여도 아주 명예로운 직업이니까요.)

예전에 지난해 기사목록 검색결과를 두고 푸념 비슷하게 하셨던 말씀은
저에게는 "사실 게임'계'를 이해하는 기자는 나 뿐이야"
라는 은밀한 자부심으로 들렸어요. 그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기자로서, 게임을 이해한다는 것은,
리버의 실드가 얼마인지, 야마토건의 데미지는 또 얼마인지,
로템의 6시가 2시에 비해 자원이 얼마나 안모이는 지 아는 것은 아니겠죠.
임요환선수가 몇연승을 했었는지,
그리고 홍진호선수가 요새 몇연승을 구가하고 있는 지 꿰고 있는 것도 역시 아니구요.
나그나로크가 몇 장 팔렸는지, 뮤 하루 동시접속자수가 얼마인지,
리니지2의 城들은 대체 얼마나 받아먹-_-을 것인지는(이건 아닌가??!)
전화 한통화만 하면 '졸라' 친절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홍보담당자가 알려주잖아요.
6하원칙 철저하고 리드문 깔끔하며, 편집기자들 수고 덜어주는
톡톡튀는 미다시(=제목)까지 달린, '기자가 쓴 기사보다 나은 보도자료'에,
편집용 고해상도 사진자료까지 맥용 EPS 포맷으로 만들어서 택배로 보내주니...
거저먹는 기사 쓰는 기자들도 많죠. 그런 기자들일 수록 목에 힘 들어간답니다.

제가 임기자를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실제로 게임을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삼는 사람들의 생활과 관심사,
목소리를 담아내려고 노력하신다는 점이죠.
아래 달린 임기자 리플을 미루어 짐작해 보아도 알 수 있었어요.

(사실 데스크-일반적으로는 편집부장, 편집국장을 지칭-가 아닌 이상,
기사에 불만이 있고, 설사 자기 분야에 대해 후배가 쓴 글이라 하더라도
수습-_-이 아닌 이상,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지나가는 말이 아니면, 하기도 힘들죠.)

지난 해 저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임요환이라는 것,
그리고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거-_-의 없지만,
이곳에 오시는 많은 분들에게 그러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아요.
임요환의 드랍십에서 내린 일곱 머린과 메딕 하나가
콜로니 위에서 만들어내는 처절한 블러드배쓰는,
기욤의 셔틀에 타고 내리는 두 리버가 순회공연하듯 폭사시키는
50이 넘는 프로브와 질럿들의 아비규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치한 애들 놀음'이자,
'교육과 나라를 망치는 위험한 엔터테인'일 수도 있지만
저같이 일과 육아에 찌들어가며 삶을 소진해가는 평범한 직딩들에겐
하루, 한주, 한달의 피곤과 삶의 우울을 풀어주는 청량제일 수도 있겠죠.
양민-_-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도 없는 놀라운 기량과 정당한 승리에 환호하고
피나는 도전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의 불운과 실수에 좌절하는 모습에 함께 힘들어 하는,
그런 모습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만들어내는 풍경이 바로
21세기 벽두에 한국을 강타하는 '디지털 게임문화'겠죠.

사실, 그 문화의 주역들은 어린 게이머들이랍니다.
그냥 게임이 좋아서, 부모님, 선생님께 욕을 먹어가며 숨어서 하다가,
게임방 알바로, 죽돌이로 '폐인'처럼 지내다가,
타고난 천재성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드디어 빛을 보고 있는,
우리가 가끔 볼 수 있는 '초고수 게임방 알바'와 그닥 멀리 있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씀이죠.
가끔 욕도 하고(첫 왕중왕전때, 다 이긴 게임에 기욤의 다크에 당해서 희대의 역전을 당한 후,
이 글의 주인공인 모 선수의 입모양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기분이 좋으면 윈드포스/할배검이건 정배 래더 승률-_-;;;이건...
아낌없이 나눠주고 올려주기도 하는, 그런 친근한 동네 청년들 말이죠...

그 소년들과 청년들의 삶과 세계를, 기성세대는,
특히 그걸 다루려는 기자는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프로게임의 저변이 확대되다 보니, 10만을 헤아리는 팬을 가진 선수도 생겨나고,
선수들이 벌이는 경기의 내용과, 현실에서 그들이 만들어가는 관계를
오버랩시켜 유추하는 '열광팬'들이 생겨나면서... 그들의 '주변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게임 내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 '게이머의 얼-_-;굴'에 특별한 느낌을 가진 사람도 있는데...
'게이머의 성격과 사생활', '게이머들 사이의 친분'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없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슴다.
그게 취향이고, 문화니까요.

'게임'이라는 텍스트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일반인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면,
'게임문화'라는 컨텍스트에 애정을 가져야 하며...
그게 바탕이 되지 않은 글은 오히려 '건전한' 게임산업의 발전에 유해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 문화에 균열을 내면서 자신의 '분'(너무 심한 표현, 아닌가 합니다만,
제 느낌은 충분히 그랬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임요환 선수의 한결같음,
을 칭찬하고 싶으셨으면, '최고 인기 게이머 가운데 하나였던 모 선수'
정도로 처리하셨을 테니까요.)을 푸는 것은 기자의 특권일 수는 있지만,
옆에서 보기에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기자가 취재를 나가면, 의원, 시장, 고위공무원들은 말 그대로 '꺼벅' 죽-_-습니다.
공보관들, 홍보실장들... 나름대로 힘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구요.
아주 원론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자의 역할은 그런 공직자들을 '견제'하는 것이고,
그 임무를 다하는 기자들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서 그들은 그렇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원론적인 이야기라는 말씀 드립니다)

"감히 새파랗게 어린 것이 기자에게, (그것도 부수 1위 조선일보 기자에게)
이렇게 건방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 알아요.
별볼일없는 기자였지만, 저도 그런 경험 있었습니다.
'열받는데 한 번 조져? 지들이 날 무시해?'

하지만, 모 선수에게 '조선일보' 기자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아무리 그 바닥의 유명인사라지만,
동네 케이블이나 인터넷으로, 그것도 개날에 한번 소날에 한번 출연하던 매스컴에서,
한자가 나와 아버지나 읽는 종이쪽지였던 '대' 신문기자가 말을 걸어 와서
당황해서 그런 행동을 보였다고 지레짐작한다면, 아주 틀린 예상일까요.
그에겐, 너무 멀리 있어서 존재감이 없는 그런 대상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번 이메일 사건은, '게임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기자의 '분함'과
'기자'의 자존심을 결코 알지 못했던 젊은 게이머의 '실수'가 낳은 에피소드라고 봐요.
하지만 이 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은 실력있는 게이머이자,
그리고 한 성실하고 재능있는 젊은이 같네요.
부디 그 선수가 이 글을 본다면,
모처럼 올라온 메이저대회를 앞두고, 좋은 모습 보여주길 기대하는 팬들에게
실망시키지 않는 길은 '우승' 뿐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쓸데없이 긴 글 읽어주신 분들,
기자윤리건, 한 게이머의 행동에 대한 제 나름의 변명논리건... 뭐 그런 것을 떠나,
'아 그넘 성질있네. 기자 알기를 뭣같이 보는 거 보니 크게 되겠어^^'
이렇게 한 번 웃어넘기고 지나치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밤 되세요.


식용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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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즐이
02/03/19 03:53
수정 아이콘
하핫.. 통쾌한 글입니다. ^^

하지만.. 뒷일이 약간은 걱정스럽군요 ^_^
강한 마음!!
stargazer
하고 싶은 말 다 해주시네요. 이 곳엔 왜 이리 글 잘 쓰는 분들이 많을까요. 무엇보다 아이디가 너무 멋져요.^^ (혹시 공업용오이님이나 피부관리용오이님도 계신건 아닌지..^^;;;)
조성일
02/03/19 06:50
수정 아이콘
너무너무멋진글이네요.
이 한마디하고 싶어서 새벽 6시에 가입했다는..... -_-;;;;
미니-_-v
무슨일이 일어났던건지 궁금해지네여...
물론, 알아야 좋은것과 모르는게 더 좋은것이 있다는걸 알고는 있지만 -_-;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아시는분 설명좀 해주셨으면...(_ _ )
나기사 카오루
02/03/19 09:29
수정 아이콘
제3자의 입장에서 해주신 객관적인 글인것 같습니다.
^^
그 모 선수가 힘내서 잘 해냈으면 좋겠네요.^^
불멸의저그
제 아이디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 저그의 팬입니다..
아주 광팬이고, 사실 x돌x이라고 불리워도 상관없습니다. 저그는 아주 쉽다.. 저그로 고수는 거저 먹기다 이런 말에 마구 흥분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님의 다소 어렵고 긴 글을 두번 세번 읽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일보사이트에 가서 문제의 글을 읽을려고 노력했지만, 인터넷 지식이 짧아서 그런지 못찾겠더군요..
아무리 광팬이라지만, 무작정 누구 편을 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못 이기는 테란, 플토의 고수를 척척 이겨주는 저그고수가 제가 평생 못 할법한 말을 했다면 사실 기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님의 차분하고 완곡한 해명(?)에 감사를 드리지만, 그런 차분한 해명을 해서 한 열기왕성한 젊은 게이머를 굳이 변호해야하는 이 사회가 싫어지네요..
아무리 원론적인 얘기지만 기자가 민주사회에서 공직자를 견제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기자의 자존심을 몰라주는 사람이 역시 문제이겠지만, 그런 자존심으로 해야할 말을 하는 기자는 과연 몇명일지.....
게이머를 비난할때마다 돈 훨씬 많이 벌고, 힘도 훨씬 세고, 훨씬 나쁜짓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분명 따로 있는데, 나쁜짓이라고 해봐야 게임밖에 못하는 불쌍한 한 게이머를 비난하는지 그게 솔직히 속상합니다.
밑에 아버님 말씀듣고 오늘부터 좋은 글은 추천하려 합니다...
이 글 추천합니당~~
박세영
02/03/19 10:10